영화
[마이데일리 = 이예은 기자] 배우 최민식이 장영실의 얼굴을 하고 스크린에 돌아왔다.
최민식은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감독 허진호) 개봉을 앞두고 라운드 인터뷰를 개최, 취재진과 만나 영화에 대한 여러 비하인드 스토리를 털어놨다.
'천문: 하늘에 묻는다'는 조선의 하늘과 시간을 만들고자 했던 세종(한석규)과 장영실(최민식)의 숨겨진 이야기를 그린 작품. '왕'과 '관노'라는 신분 차이를 뛰어 넘어 하나가 된 세종과 장영실의 특별한 우정이 영화에 담겼다. 장영실은 세종의 오랜 총애를 받으며 수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세종 24년 당시 발생한 '안여(임금이 타는 가마)사건' 이후 사라져 어느 기록에서도 찾아 볼 수 없게 됐다. 당시 장영실의 감독 아래 제작됐던 안여가 허물어진 사건이다. '천문'은 이러한 실제 역사에서 출발해 영화적인 상상력을 동원해 완성됐다.
각각의 업적보다는 이들의 관계를 집중 조명, 신선한 재미와 감동을 안겼다. 이와 관련해 최민식은 "드라마에 집중하려고 했다. 업적, 정치적인 상황은 다 아는 이야기지 않나. 우리가 다큐멘터리를 찍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상황 등이 영화적으로 하나의 재료가 될 수 있더라도 그게 주제가 되면 재미없다.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궁금해서가 제가 이 작품을 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기록되지 않은, 합리적인 유추를 해볼 수 있는 지점이 머릿속에 계속 그려졌어요. 둘이 계급장 떼고 친구처럼 지냈을 거 같았죠. 실제 나이는 장영실이 7살 더 많았다고 해요. 또 한 사람은 최고의 지위, 한 사람은 완전히 천민 출신인데도 큰 대의를 위해 의기투합해요. 천문의기들을 만들 때, 둘만 있을 때 과연 어떤 이야기가 오갔을지 궁금했어요. 우리의 상상력 속에서 많이 표현되길 바랐어요. 두 사람의 감정과 논리에 더 집중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갔으면 했죠."
영화 '올드보이'를 비롯해 '악마를 보았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의 전성시대', '명량', '특별시민' 등 다수의 작품으로 독보적인 카리스마를 발산했던 최민식은 이제껏 연기해왔던 캐릭터와는 결이 다른, 장영실을 연기했다. 그는 "순수한 창작자의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최민식은 "데니스 홍이라는 로봇 과학자 분이 강연하는 프로그램을 봤다. 과학자로서 로봇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장영실도 저런 느낌이겠구나 싶었다. 천진난만한 아기 같았다. 로봇을 얼마나 사랑하는지가 느껴졌다. 창작을 하는 사람들이 갖는 순수한 몰입이었다. 극중 장영실은 가장 비정치적인 인간이다. 명나라와의 껄끄러운 외교 관계를 정치적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내가 만들었는데 왜 너네 것을 베꼈다고 해'라면서 화가 나는 거다. 제가 해석한 장영실은 그렇다. 세종 곁에 죽을 때까지 있으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뿐이다. 정말 잘 할 수 있는 일이니 얼마나 행복했겠나"라고 자신이 해석한 바를 전했다.
장영실은 최민식에 의해 재탄생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자료가 많이 없었다. 더욱이 몇 살 때 사망했는지에 대한 기록도 없다. 막연했지만 실록의 한 부분을 참고했다. 세종이 지근거리에 두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생활했다는 게 힌트였다. 그럼 보통 관계가 아닐 거다. 저는 궁 후원을 버선발로 뛰어다니는 장영실의 모습이 상상됐다. 임금과 신하의 권위적인 관계가 아닐 것 같았다. 그래서 궁에서 근무하는 다른 사람들 눈에는 '미친놈' 같았을 수도 있다. 자유롭고, 순수하고, 꽂히면 그것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물론 사람인데, 매번 좋기만 했겠나. 하나의 아이디어를 놓고 서로 간의 작은 대립도 있었을 것 같았고, 자신을 찾지 않는 세종에게 질투심도 느끼지 않았을까"라고 전했다.
"장영실이 하급관리직으로 가게 되잖아요. '왜 그랬지?' 싶을 거예요. 세종의 곁에서 멀어진다는 것에 대한 조바심이 있었을 수도 있죠. 한글 창제 초기에도 자신을 부르지 않아 서운해하는데, 천지분간을 못하는 거죠.(웃음) 또 창호지에 구멍을 뚫어 별을 만들어주는 장면이 저는 너무 좋았어요. 아기 같이 좋아하는 모습이 잘 표현됐어요. 혹은 저만의 가설로 '이제 써먹을 만큼 써먹었다' 식으로도 상상해보기도 했어요. 이런 게 참 재미있어요."
특히 1994년 드라마 '서울의 달', 1999년 영화 '쉬리'(감독 강제규) 이후 20년 만에 작품으로 한석규와 재회한 최민식은 이날 깊은 우정의 역사를 풀어놓으며 뜻 깊은 소회를 전하기도 했다. 대학교 때부터 인연을 이어왔다던 그는 "'서울의 달'을 할 때는 촬영이 임박해서 대본이 나올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앙상블을 이룰 수 있던 건, 서로의 호흡이 좋았던 거다. 그게 더 좋아지고, 나빠지고는 없다.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만나서 작품 이야기 별로 안 한다. 그냥 뭐 먹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맛집 투어' 같은 거 공유한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20년 만의 연기 호흡인데도, 엊그제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 같았어요. 어색함이 없고 바로 옛날로 돌아갔죠. 대학교 때 시작된 인연이 작품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 건 분명해요. 제가 대학교 2학년 때 (한)석규가 1학년으로 들어왔어요. 이제 50대 후반이 됐는데, 그런 세월이 도움이 많이 됐어요. 굉장히 가까웠던 사이었거든요. 장난도 많이 치지만 진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눴어요. 여전히 영감님 같고, 한결같아요. 사람들을 붙잡고 인터뷰를 하는 등 별난 모습들도 많은데 그게 참 좋아요. 연예계에 몸을 담고 있는데, 여전히 진지하고 자기 일에 집중하는 사람이 흔치 않아요. 과하거나 모자라지도 않고, 오만방자하지도 않죠. 똑같아요. 다만 조금 더 (말이) 늘어지게 됐다는 점이 다르네요.(웃음)"
또 최민식은 "허진호 감독이 의도해서 우리한테 대본을 준 것 같다. 누가 세종하고, 누가 장영실할지 알아서 결정하라고 했다. '알아서 결정하란다. 너 뭐할래?'라고 하니 석규가 먼저 세종을 하겠다고 했다. '뿌리깊은 나무'에서 했는데, 또 해도 괜찮겠냐고 물었는데 '다른 걸 보여주고 싶다'고 하더라. 그래서 그냥 내가 장영실을 하게 됐다"라며 "나는 두 캐릭터 모두 괜찮았다. 왕은 다음에 하면 되니까. 왕이 뭐 세종만 있나. 그냥 같이 하는 게 좋았다. 꼭 '천문'이 아니었어도 됐다. 허진호 감독이 우리 둘의 역사를 아니까 계산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두 사람의 끈끈한 친분이 영화의 명장면을 탄생시키는 데도 도움이 됐다. 특히 극중 세종과 장영실이 함께 누워 하늘의 무수한 별을 바라보는 장면은 애틋하고, 따뜻하다. 해당 장면은 한석규의 아이디어였다.
최민식은 "원래 대본에서는 두 사람이 궁 후원 어딘가에 그냥 앉아서 이야기하고 별을 보는 거였는데, 석규가 누워서 하자고 하더라. 왕과 관노가 한 곳에 누워 별을 보는 행위 자체가 파격이다. 그게 세종의 열린 마음, 열린 군주로서의 모습이다. 장영실은 드디어 세종의 품속으로 드는 거다. 드디어 '세장커플'(세종+장영실)의 스타트다. 그 시점을 밋밋하게 앉아서 말만 절절하게 하기보다는 나란히 누워 하늘을 바라보면 더 와닿을 것 같았다. 그런 게 자유로움이다. 아이디어를 내서 실현했을 때, 또 효과도 좋다. 그 재미로 한다"라고 전했다.
"허진호 감독이 그렇게 놀 수 있게 만들어줘요. 그러니 고맙죠. 잔소리가 심한 사람이 아니에요. 두런두런 이야기하면서 '그렇게 한번 해보세요'라고 해요. 그랬으니 우리가 그렇게 까불었죠. 연출가가 참 중요한데, 허진호 감독은 배우나 스태프들 이야기를 잘 들어요. 아주 멋있어요."
명불허전 연기력과 뚜렷한 존재감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가 된 최민식. 화려한 필모그래피만큼 흥행 역사도 다양하다. 1761만 관객을 동원해 역대 흥행 영화 1위를 차지한 '명량'의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다소 아쉬운 성적표를 받아든 적도 적지 않다. 이와 관련해 최민식은 "내 필모그래피를 별로 돌아보지는 않는다. 흥행 되면 안 좋은 배우가 어디 있겠나. 설령 안 됐다고 하더라도, 왜 소통을 못했는지에 대한 복기는 할지언정 연연하지 않는다. 사람인지라 신경은 쓰이는데 빨리 잊으려고 노력한다"라고 소신을 전했다.
무엇보다 현 한국 영화계에 대한 진심 어린 걱정과 나아갈 방향을 이야기하던 최민식은 "저는 관객에 있어서 부담이 없는 사람이다. 이기적이다. 연극의 3대 요소 중에 관객이 들어가는데, 저는 관객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단언컨대 저를 위해서 연기한다. 단 내가 출연한 작품을 통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 잘 보이고 싶지 않다. 제 인생을 느끼고 싶다. 대중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 게 아니다. 자연스럽게 되는 거다. 제 행위를 보시고 때로는 위로를 받고, 분노하고, 삶을 느끼는 수단일 뿐이다. 잘 보이려고 움직이는 건 전혀 없다. 그건 분명하다. 다른 배우들을 비판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제 경우는 그렇다. 내 인생을 위해서다. 가공된 인물과 스토리를 통해 삶과 인간을 느끼는 거다"라고 힘주어 말해 그의 남다른 내공을 엿보게 했다.
한편, 최민식이 장영실로 열연한 '천문: 하늘에 묻는다'는 오는 26일 개봉한다. 최민식과 한석규를 비롯해 배우 신구, 허준호, 김원해, 전여빈, 김홍파, 김태우, 임원희 등이 탄탄한 연기력을 소유한 배우들이 출연했다.
[사진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이예은 기자 9009055@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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