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이데일리 = 이예은 기자] 포스터에 깜빡 속았다. 영화 '사라진 시간(감독 정진영)을 미스터리 추적 스릴러라 생각하고 극장에 들어서면 뒤통수가 얼얼할 테다. 대신, 배우가 아닌 감독 정진영이 설계한 기묘한 세계에 빨려 들어간다. 미스터리도, 스릴러도, 공포도, 휴머니즘도 아니다. 장르의 경계를 무너뜨린, 실험적인 연극 한 편을 본 듯한 기분이다.
이야기는 서울에서 한적한 시골로 내려온 수혁(배수빈), 이영(차수연) 부부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한없이 선량하고 애틋해 보이지만 부부에게는 남모를 비밀이 있다. 그러던 중 의문의 화재사건이 발생, 두 사람은 이 마을에서 사라진다. 수사에 나선 형사 형구(조진웅)는 해균(정해균), 두희(장원영)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을 의심하지만 어느 날 밤을 기점으로 모든 게 뒤바뀐다. 자신의 인생마저도.
형사로 살아온 형구에게 모두가 '선생님'이란다. 아내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었고, 자식들은 증발했다. 형구는 끝없이 지난날의 삶을 강조하며 혼란에서 벗어나려 애쓰지만 더 엉키기만 한다. 어제의 나는 누구이며, 오늘의 나는 누구이며, 그리고 내일의 나는 누구인가. 이젠 자신마저도 의심스럽다.
영화의 비밀은 처음부터 끝까지 풀리지 않는다. 어쩌면 비밀이 아예 없을 수도 있겠다. 시간은 순차적으로 흘러가고, 공간도 뒤틀리지 않지만 한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크게 뒤집히면서 강력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추리의 맛도 손쉽게 유도한다. 하지만 정형화된 재미가 아니다. 기존의 영화적 문법을 벗어나 새로운 스타일을 완성하려는 정진영 감독의 고민이 깃든 참신한 매력이다.
관객석에서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웃음도 인상적이다. 상황은 심각한데, 연극적인 대사 표현, 사실감 넘치는 인물의 성격 등으로 유머 코드를 유지한다. 일종의 블랙 코미디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조진웅은 훨씬 더 힘을 뺐고, 솔직해졌다. 특유의 연기 톤이 남아있지만 몰입을 방해하진 않는다. 배수빈과 차수연은 이야기의 발단인 만큼 극적인 형용을 선보이고 정해균, 장원영, 이선빈 등은 의도된 작위적인 연기로 영화의 색깔을 선명하게 한다.
가장 중요한 건 이 영화엔 해소도, 해결도 없다. 말이 되는 것도 없다. 완성과 해석은 관객의 몫이다. 그저 형구의 상황과 감정을 따라가고 그의 고민을 함께 하는 것, 사색에 젖는 것. 작가주의를 추구한 정진영 감독의 소통법이다. 관객들이 정답 없는 결말에 기꺼이 티켓값을 지불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규정할 수 없는 재미와 깊은 여운을 만끽하고 싶다면 과감히 선택해도 좋을 듯 하다. 18일 개봉.
[사진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이예은 기자 9009055@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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