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영화
[마이데일리 = 이예은 기자] 살아온 세월이 개인의 품격을 결정한다. 배우 예수정(65)은 "나는 그냥 아직도 철이 없는 거죠"라고 말하며 웃었지만 그는 자신이 구분 지은 '나이 드는 노인'과 '성장하는 어른'의 차이를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예수정은 최근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영화 '69세'(감독 임선애) 홍보차 인터뷰를 열어 마이데일리와 만났다. 좀비로 변해도 선한 성정은 지우지 못했던 '부산행'의 좀비, 1400만 관객의 눈물샘을 터뜨렸던 영화 '신과함께-죄와 벌' 속 수홍의 엄마,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의 피도 눈물도 없는 장회장 등 다채로운 여성 캐릭터를 연기했던 그가 이번엔 사회가 정해놓은 노인의 틀에서 벗어난 69세 노인, 효정으로 분했다.
'69세'는 비극적인 상황에 처한 69세 효정이 부당함을 참지 않고 햇빛으로 걸어나가 참으로 살아가는 결심의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제24회 부산 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에 선정돼 소개된 후 관객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 관객상을 수상했다. 예수정이 연기한 효정은 29세 남자 간호조무사(김준경)로부터 성폭행을 당하지만 오히려 치매 노인으로 의심을 받는다. 조용히 삶을 살아내던 효정은 마침내 용기를 내고, 가해자를 고발, 그리고 스스로 지켜내는 방법을 찾는다. 예수정은 많은 대사 없이도 눈빛과 몸짓만으로 효정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다.
예수정은 출연 결정 당시를 떠올리며 "여성의 성 문제를 다룬 영화는 많았지만 이 영화는 상당히 개인적인 삶의 이야기다.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며 "사실 처음 대본을 봤을 때 성폭행 문제는 소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여성에게 성폭행이라는 건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이지 않나. 그래서 그냥 노년과 여성을 연결 지은 소재라고 생각했고, 우리나라에 이런 일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감독에게 물었더니 실제 사건이 있었다더라. 많지는 않지만 일어나고 있었다. 너무 약자니까. 나중에 아무 일도 없을 거니까. 실화에 기인한 거였고, 그래서 흥미로웠다. 한 인물이 겪은 참담한 일을 어떻게 대처해나가는지, 효정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흥미로웠다"라고 말했다.
"노년의 모습을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노년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고, 조심스럽고 적극적으로 쓴 작품을 보지 못했어요. 정치색을 입은 집단으로 그려지는 경우는 있어도요. '69세'는 일어난 일은 특수하지만 그걸 감당해나가는 노년의 삶에 대한 태도는 지극히 사실적으로 그려요. 그래서 작품이 참 괜찮다고 생각했죠. 효정을 바라보는 인물들에 관객들도 기가 막혔을 거예요. 하지만 사실 우리도 그들처럼 바라봤을지도 몰라요. 노년은 이래도, 저래도 살아요. '짬밥'이 있으니까.(웃음) 그대들이 어떻게 생각해도 효정은 그냥 살아갑니다."
연출을 맡은 임선애 감독을 두고선 "따뜻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예수정은 "저랑 다르다. 효정에 대한 애달픔이 있다. 실제 인물을 보듯 효정을 너무나 불쌍히 여긴다. 그래서 마지막에 효정을 안아주고 싶었나보다. 극중 동인(기주봉)과 반지를 나눠 끼는 장면을 넣으려고 하길래 제가 안 된다고 했다. 결혼은 이미 한번 다녀오지 않았냐.(웃음) 보통 여성이면 남자에 의탁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거 아니다. 그리고 동등해야 결혼하는데 영화는 그렇지 않다. 또 효정은 자기가 떳떳하지 못해서 딸도 못 찾아가고, 어려움을 당하고도 피해를 안 끼치려고 머물던 집에서 나왔다. 그런 인물이라면 동민과 결혼 안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었다. 그래서 고백문을 쓸 수 있던 거다. 결혼했다면 효정의 축이 흔들렸을 거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69세'는 정의 구현으로 막을 내리지 않는다. 대신 효정은 다시 발을 내딛는다. 예수정은 "노년도 성장을 한다. 그게 핵심이고 희망이다. 우리의 미래다. 지금 망조가 든 세상 같지만 이건 과도기다. 늘 인류의 역사는 상향으로 가고 있다. 제가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라 모르겠지만 성장하고 있다. 효정이 고백문을 올려놓고 떠나는 건, 스스로를 억압했던 것에서 풀려나는 거다. 사실 개인을 억압하는 건 자신이지 않나. 나 역시 그렇게 살아왔다. 억압에서 풀리고 성장하는 것처럼 한 발을 내딛어야 해방이다"라고 전했다.
예수정이 생각하는 노년의 모습은 무엇일까.
최근 광화문 집회를 둘러싼 여러 계층의 행동에 안타까움을 표하던 그는 "나와 같은 노년의 모습이 저런 건가 싶었다. 하지만 제 주변에도 노인이 참 많은데 다 그렇지 않다. 나는 노년과 어른을 따로 놓고 생각한다. 어른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공적인 일에 영향을 미치는 건 삼가도록 해야 한다. 자기가 책임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아우르는 모습도 있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꿈을 향해 가는 청춘, 항상 왕성하게 살아가는 중년, 아이를 책임지고 살아가는 등 이러한 과정을 밟고 50이 넘어가면 어른의 모습이 사라져요. 사실은 그렇지 않은 노년이 더 많거든요. 그들은 워낙 조용하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가 없을 뿐이죠. 그걸 보여주는 게 대중매체나 예술가고, '69세'의 미덕이 바로 여기에 있어요. 이 작품 속에서는 69세 여성이라는 주인공이 소수,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살아나가기 위해 노력해요."
예수정은 특별히 노년의 모습을 그리지 않고 살아왔다고 말했다. "오늘에 충실하면 또 다른 충실한 내일이 온다"고 말할 뿐이었다. 이러한 생각에는 어머니인 원로배우 고(故) 정애란의 영향이 컸다.
"죽음은 제2의 인생 관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때가 궁금하고, 고민은 없어요. 어차피 살아온 성질대로 죽을 테니까요. 저희 어머니는 '쿨'하신 분이었는데 정말 딱 그렇게 세상을 떠나셨어요. 물론 중학교 때까지는 배우의 딸이라는 게 부담스러웠어요. '배우의 딸이니까 문란하거나 삶이 다르겠지'라는 말을 듣기가 싫었고 아직도 그때의 내숭이 남아있어요. 그래도 고등학교 때까지 '누굴 존경하느냐'고 물어보면 엄마라고 했어요. 솔직했고 잔소리도 하지 않았죠. 근면성실을 온몸으로 보여주신 분이에요. 그런 걸 보면서 존경심을 키웠죠. 대신 제가 배우하는 걸 엄청 반대하셨어요. 그게 다행이에요. 상관없이 나대로 살았으니까요. 한번도 제 공연을 보러오신 적이 없는데 감사해요. 그래서 저도 제 딸은 철저히 외면 중이에요. 각자도생이죠.(웃음)"
최근 활발한 작품 활동으로 대중과 보다 더 가까워진 예수정. 일부는 '예수정처럼 늙어가고 싶다'며 존경을 표하기도 한다. 그러자 예수정은 "지금보다 연령대가 낮았을 때는 그런 말이 반가웠는데 지금은 놀리나 싶다.(웃음) 고맙긴 한데 할 말이 없다. '왜 그래'나 '응 그래'라고 하기도 우습지 않나. 적절한 답을 못 찾겠다"고 너스레를 떨며 "전 상당히 자유롭다. 흔히 철이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개념이 없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인기가 높아진 건 아니에요. 다만 그 옛날 모범생의 한을 풀 듯이 히피처럼 살고 있었는데 지금은 다시 예절을 지켜야 할 것 같은 억압을 30% 느끼고 있어요. 하하. 제가 무명 배우로 유명한 사람이거든요. 제 이름 석자는 몰라도 '검블유의 장회장님', '수홍이 어머님'이라고 불러주시는데,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인물로 봐주시는 게 행복해요. 제 진짜 이름은 잘 모르시지만요."
인터뷰 말미 예수정은 "69세라는 단어를 글자로 보는 것과 주변의 노년을 떠올려보면 느낌이 다르다. 그래서 이 작품이 사실적이다. '노년 69세'라는 말은 없지 않나. 영어 제목은 '언 올드 레이디(An Old Lady)'더라. Woman이 아니다. 여성성을 강조한 것이다. 교태 의미의 여성성이 아니라, 이 세상에 없어져서는 안 될 여성성 말이다. 간혹 '여성 노년 배우'라는 말이 꼭 나온다. 외국에서 '남성 노년 배우'라는 말은 없지 않나. 그냥 배우라고 하면 된다. 이 호칭이 나오는 걸 보면 '69세'가 편견 속에서 이야기를 잘했구나 싶다. 그냥 심플하게 부르자. 배우다"라고 말하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69세'는 20일 개봉한다.
[사진 = 엣나인필름 제공]
이예은 기자 9009055@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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