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마이데일리 = 장윤호 기자]2011년 9월7이었다.‘타격의 달인(達人)’이라 불리던 장효조 삼성 2군 감독이 7일 오전 세상을 떠났다.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 겨우 일주일 후인 9월 14일 새벽 ‘철완(鐵腕)’ 최동원 전 한화 2군 감독이 별세했다. 장효조 감독이 1956년생으로 55세, 최동원 감독이 58년생으로 53세였다.
두 분 모두 한국야구의 전설이자 상징적인 존재로 현역 시절부터 야구사에 큰 기록과 족적을 남겼다. 그리고 한국야구 발전을 위해 그분들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기에 야구계와 팬들의 안타까움은 더 컸다.
한국프로야구 초창기 발전을 이끈 장효조, 최동원이었기에 출범 40년째인 올시즌 역대 최고 위기를 맞은 상황에서 유난히 두 전설들이 떠오른다. 살아 계셨으면 60대 중반인 두 분이 한국야구계에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9월이면 10주기가 된다. 2021년 한국야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공교롭기도 했다. 1982년 출범한 한국프로야구는 그해 9월13일 경기에서 사상 최초로 정규 페넌트레이스 600만 관중을 돌파했다. 1위 삼성과 2위 롯데가 13일 대구구장에서 격돌했는데 오후 2시30분에 매진이 됐다고 한다. 장효조는 삼성의 간판 타자, 최동원은 롯데의 상징적인 투수였다. 프로야구 600만 관중 시대를 연 다음 날인 14일 최동원 감독이 운명을 달리한 것이다.
당시 14일 아침 모든 언론매체에 프로야구 관중 600만 시대가 대서특필됐는데 느닷없이 최동원 감독의 부고가 날아들어 팬들을 망연자실 하게 만들었다. 장효조와 최동원 모두 프로야구가 국민 스포츠로 우뚝 서는데 밑거름이 된 분들이다.
장효조와 최동원 감독은 명성만을 놓고 막연히 생각하면 누구나 화려한 현역 시절만을 떠올리게 된다. 그 뒤안길에서 그분들이 겪었던 고통은 곁에서 지켜본 분들이 아니면 아무도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야구가 두 분에게 화려한 명성과 불멸의 기록을 안겨줬지만 어쩌면 야구가 그분들이 이렇게 일찍 팬들의 곁을 떠나게 만든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에 쓸쓸하기만 하다. 장효조 삼성 2군 감독이 마지막으로 팀을 지휘한 것은 8월1일 월요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2군 경기였다. 당시 모 방송사에서 생중계를 했다.
장효조 감독은 정밀 진단을 위해 삼성의료원에 급히 입원을 해야 했지만 이를 미루고 경기를 이끌었다. 문병을 사양한 채 삼성의료원에 입원해 있던 8월6일 토요일 삼성 암센터 입원실에서 만났다. 그는 “경기를 TV에서 생중계하면 감독인 내가 벤치에 없으면 되겠느냐. 그래서 입원을 늦췄다”고 했다.
상태의 심각성도 모르고 무작정 ‘언제 수술하십니까?’라고 물었는데 ‘간이라서 수술이 안 된단다. 간에 3개 종양이 있는데 간부터 다스리고 그다음에 위를 치료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 대답에 가슴이 멍해졌다.
암은 수술만 할 수 있다면 희망이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번 더 전화 통화를 한 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정도로 빨리 장효조 감독이 유명을 달리했다. 곧바로 장례식장으로 내려갔는데 선동열 감독이 다녀갔고 김용희 감독이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김용희 감독은 장효조 타격코치와 함께 처음 롯데 감독으로 데뷔했다.
경남고 출신의 최동원 감독은 7월22일 목동구장에서 군산상고-경남고의 레전드 리매치에서 마지막으로 유니폼을 입었다. 경남고 레전드 단장이었던 구본능 희성전자 회장은 그 후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가 돼 한국야구 황금시대를 이끌었다.
당시 최동원 감독의 극도로 수척해진 사진을 보고 모두들 놀랐는데 그는 그때도 그리고 끝까지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최동원 감독은 자신의 운명을 알고 마지막으로 야구 유니폼을 입고 싶었던 것 같다.
거슬러 올라가면 선수로서 절정기를 구가했던 장효조와 최동원은 1988년 11월과 12월 야구 인생의 행로가 바뀌었다. 롯데의 최동원이 11월22일 먼저 삼성 김시진과 트레이드됐고, 해가 바꾸기 직전인 12월20일 삼성의 장효조가 롯데의 김용철과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훗날 확인했지만 트레이드가 먼저 언론에 흘러 나간 시기와 규모가 나뉘고 늦어졌다. 1대1은 아니었고 여러 선수들이 포함됐지만 충격적이었던 것은 장효조와 최동원이 고향팀에서 트레이드됐다는 사실 자체였다.
이후 장효조와 최동원의 야구 인생은 부침을 겪었다. 장효조 감독은 자신이 병을 얻은 것에 대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했다. 아마도 유니폼을 입지 못한 채 스카우트를 하던 시절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프로야구 30년 레전드 올스타로 뽑히고 삼성 2군 감독으로서 의욕적으로 일했는데 “이제 야구 인생이 탄력을 받으려 하는데 아프네”라고 쓸쓸히 웃었다.
최동원 감독도 오랜 투병에 일이 없었다.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삼성으로 트레이드된 후 야구계와 연락을 끊고 잠적하기도 했고 1991년에는 갑자기 부산 서구에서 지방의원 선거에 출마해 선거사무실에서 의원 후보 최동원과 부친을 만나 인터뷰한 기억이 있다. 야구인이었던 최동원은 야구 인생의 후반기가 순탄치 않았다.
한국 야구의 전설인 장효조와 최동원은 결국 프로야구의 꽃인 1군 감독을 해보지 못하고 떠났다. 그들이 삼성과 롯데의 사령탑으로 팀을 이끌었다면 팬들은 얼마나 즐거웠을까. 끝내 야구는 두 분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2011년 9월 야구무상(野球無常)칼럼 참조]
장효조, 최동원 두 분의 10주년 기일이 다가온다. 때로는 야구가 무정(無情)하다.
장윤호 기자 changyh218@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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