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일반
[이승록의 나침반]
▲ 연우는 배우다
걸그룹 시절부터 켜켜이 쌓아올린 연우의 연기는 '금수저'를 거머쥐자 욕망의 화신 오여진으로 발화했다. 금수저를 탐내며 화르르 타오르던 여진의 눈빛으로 연우는 "감독님을 만났을 때 정말 하고 싶었어요. 여진의 캐릭터가 주는 매력이 너무 컸어요"라고 말했다.
스스로 '터닝 포인트'라고 짚었을 정도로 연우의 연기는 MBC 드라마 '금수저'에서 도드라졌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여진의 목소리였다. 승천(육성재)이 자신의 악행을 자책하며 "난 쓰레기야"라고 비관하자 여진은 "쓰레기라고 쳐. 근데 그게 뭐. 가난하게 태어난 게 우리 잘못은 아니잖아. 돈이 없는데, 부자가 되고 싶은데, 근데 기회가 찾아와서 바꾼 것뿐이잖아"라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욕해도 상관 없어. 난 너만 있으면 돼. 우린 이제 돌아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잖아"라고 말한다.
그 순간 여진의 목소리는 욕망에 사로잡혀 냉정하고 비장했으나, 돌아갈 데 없는 여진의 절박한 심정이 담겨 사르르 떨리고 있었다.
다만, 정작 14일 서울 강남구 나인아토엔터테인먼트 사옥에서 만난 연우에겐 '금수저' 속 여진의 독기는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스물여섯 살 이다빈(본명)의 모습을 한 채 연우는 "집에서는 주로 게임 해요. 가끔 강남에 있는 서점에 세수도 안하고 가서 책도 보고요. 절 알아본 분이요? 딱 한 분 계셨는데, 그때 제가 머리도 안 감고 간 바람에 그 다음부터는 모자 열심히 쓰고 다니거든요"라고 말하며 크게 웃었다.
▲ 속이려 하지 않는다
2016년 아이돌로 데뷔해 어느새 7년차가 되었으나, 자신의 이미지를 능란하게 포장하거나 깊이 있는 배우처럼 보이려고 꾸며내는 느낌은 찾아볼 수 없었다. 걸그룹을 그만두고 배우로 전향하게 되었을 때의 심경도 대화 중에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이야기였다.
"그때 많이 '힘듦'에 빠져 있었어요. 많은 것을 쏟아부었던 일이었거든요. 제가 긴 청춘은 아니지만,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을 바친 일을 좀 빠르게 마무리 짓게 되니까 거기서 오는 허탈함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방황도 하고 힘들었어요. 근데 그 시기가 저를 받쳐주는 것만 같아요. 그때 한번 무너져보니까, 이제는 안 좋은 일을 겪어도 '어쩔 수 없지' 하고 지나 보낼 수 있게 되었어요."
▲ 무너져 본 사람
연우에게는 '절망'이 운명을 바꿔준 금수저였다. 드라마 '금수저'를 보며 들었던 의문은 '연우의 연기가 어째서 비극적으로 느껴지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의문의 해답은 연우가 거쳐온 삶에 있었다.
바닥에 내려가 본 사람은 바닥을 연기할 필요가 없었다. "힘든 순간이 찾아오면 비우는 시간을 가져요. 감정의 바닥까지 푹 빠졌다가 다시 확 올라오려고 노력해요. 그러면서 생각을 비워요." 대신 바닥의 깊이를 아는 사람은 비워진 만큼 온전히 자신의 감정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가수 활동을 할 때도 그런 게 있었어요. 내가 좀 더 잘해야 스스로 가수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요. 제가 하는 일에 부담이 컸던 것 같아요. 아이돌 출신 배우란 부담도 처음에는 많았고요. 어쩔 수 없이 현장에서 기대하는, 아이돌 친구들의 밝은 면이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근데 감독님이나 선배님들이 '애쓰지 않아도 돼' 해주시더라고요. 이젠 부담을 좀 덜어냈어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은 굳이 아이돌 출신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다 하는 생각이니까요."
▲ 연우는 배운다
'금수저'를 내려놓은 연우는 다시 감정을 비우고 스물여섯 살 이다빈으로 돌아왔다.
"악역이요? 재미는 있는데 상대 분한테 너무 미안해요. 폭력적인 말이나 행동을 많이 하잖아요. 뺨을 때리는 신 찍을 땐 미안해서 말도 못 걸겠어요. 촬영이 너무 어렵더라고요."
연우의 안에서 화르르 타오르던 여진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여진의 열기만큼은 연우의 내면에 맴돈다. 여진의 굴곡진 인생을 배운 연우의 연기는 이제 뜨거울 일만 남았다.
"제 연기에 스스로 만족할 순 없지만, 제가 노력했다는 것만큼은 만족해요. 여진이를 준비하면서 말투나 억양을 만들어야 하니까 어떤 톤의 목소리가 좋을지 계속 녹음하면서 연습했어요. 촬영이 끝날 때쯤 되니까 목소리를 녹음한 게 몇 백 개가 쌓여있더라고요."
비장하고 절박하던 오여진의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우린 이제 돌아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잖아." 무너져 본 사람. 연우의 연기가 비극적으로 느껴진 건 그 때문이다. 여진을 비워낸 연우가 다시 감정의 바닥까지 채워줄 새로운 사람을 찾고 있다.
"어떤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해버리고 나면, 그것 밖에 생각 못할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떤 배우가 되고 싶어?' 물으면 '비워두고 싶다'고 해요. 비워둬야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거든요."
[사진 = MBC, 나인아토엔터테인먼트 제공]
이승록 기자 roku@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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