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레저
[시조시인·여행작가 신양란] 앞서 소개한 것처럼 핀란드는 학창 시절 내게 막연히 정이 가는 나라였다. 몇 년 동안 펜팔로 편지를 주고받은 친구들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핀에어를 타고 이탈리아 가는 길에 스톱오버로 헬싱키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 계획이었는데 막상 도착해서는 하루를 못 버텼다. 쌀쌀맞은 사람들한테 상처받고, 높은 물가에 주눅 들었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 부부가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피난처는 헬싱키에서 기차로 갈 수 있는 러시아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
별다른 정보 없이 선택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도착하자마자 뒤통수를 때렸다. 핀랸츠키 역에 내려 호텔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고 보니 미터기가 없었다. 요금을 흥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택시를 타지 않고는 호텔에 갈 방법이 없으므로 타기는 해야 하는데 영 찜찜했다. 일단 예약한 호텔 주소를 보여주며 얼마냐고 물으니 “25유로(3만8000원)를 달라”고 했다. 말도 안 되는 금액이라 고개를 젓고 물러서니 “그럼 23유로를 달라”고 하는데 그것도 터무니없는 금액 같았다.
그렇게 흥정하는 동안 다른 택시들이 손님을 태우고 떠나버려서 나중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가 예약한 호텔이 상트페테르부르크 어디쯤에 있는지조차 모르고 왔으니 말이다. ‘아마도 기차역에서 거리가 아주 많이 떨어진 곳에 있는 호텔을 예약했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할 수 없이 그 택시를 탔다.
그런데 택시는 뽈뽈뽈 아주 짧은 거리를 가더니 다 왔다며 내리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지하철 한 구간 거리였다. 그렇게 도착하자마자 뒤통수를 호되게 맞고 나니, 그냥 헬싱키에서 버틸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곧이어 호텔 체크인을 하려 하니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리셉션 직원이 컴퓨터를 한참 동안 두드려대더니 예약 내용이 없다며 고개를 젓는 거다. 전날 오후에 헬싱키에서 예약했는데, 그 내역이 아직 호텔에 도착하지 않은 듯했다. 예약 내용을 캡처한 사진을 보여주며 다시 확인해 달라고 부탁하니 여기저기 전화를 걸며 애를 쓰기는 하는데, 별 소득이 없는 모양이었다.
‘끝내 예약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다며 방을 안 내주면 어떡하나. 빌어먹을 택시를 또 타고 방을 구하러 다녀야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하니 숨이 턱 막혔다. 예약하면서 나흘 밤 묵는 비용을 전부 지불한 상태이기 때문에 물러설 수 없기도 했다.
호텔 로비에서 꿋꿋하게 버틴 끝에 가까스로 예약이 확인되어 체크인에 성공하고 나니 맥이 탁 풀렸다. 아무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의 피난은 잘못된 선택 같기만 했다.
그러나 방에 들어서고 보니 불평불만과 짜증이 눈 녹듯 사라졌다. 방이 생각보다 널찍하고 쾌적했기 때문이다. 헬싱키 호텔과 같은 금액인데, 컨디션은 비교 불가였다. 헬싱키 호텔에 별 두 개를 준다면 상트페테르부르크 호텔에는 다섯 개를 주고 싶을 정도였다.
이곳 물가가 그러하니 나머지 여비도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그렇게 호텔 방 때문에 후한 점수를 받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알고 보니 훨씬 더 멋진 것을 간직한 도시였다. 러시아 제국 당시 수도였던 이곳은 에르미타주 미술관, 국립 러시아 박물관, 그리스도 부활 성당, 성 이삭 성당, 카잔 대성당,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 예카테리나 여름 궁전, 넵스키 수도원 묘지 등 알토란 같은 문화유산을 잔뜩 가졌다.
단순한 피난처였던 그 도시에 흠뻑 매료된 나는 그다음 해 다시 그곳을 방문해 좀 더 꼼꼼하게 살펴보았고, 그 결과를 2017년에 <가고 싶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정리해 출간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바람에 지구촌 밉상이 되어 버린 러시아는 우리에게 여행지로서 매력도 상실했다. 아마도 당분간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여행하라고 권유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러나 사람이 밉지, 도시야 무슨 죄가 있는가. 이 멋진 도시가 사람들 사랑을 다시 받을 수 있는 날이 오기는 나는 바란다.
|신양란. 여행작가, 시조시인. 하고 싶은 일, 즐겁고 행복한 일만 하면서 살고 있다. 저서로 <여행자의 성당 공부><꽃샘바람 부는 지옥><가고 싶다, 바르셀로나><이야기 따라 로마 여행>등이 있다.
신양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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