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마이데일리 = 허설희 기자] 연극 '택시 드리벌' 속 화이는 적은 분량이지만 주인공 덕배의 인생을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역할이 크다. 우울하기도 하지만 또 아름답기도 한 덕배의 비운의 첫사랑 화이는 그래서 더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주인공 덕배가 자신의 직업인 '택시 드라이버'를 잘못 발음한 데서 붙은 이름으로 팍팍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현대 소시민의 군상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코미디 연극 '택시 드리벌'은 앞서 엄정화, 신유진, 이민정을 화이로 내세웠다.
영화감독 장진의 대표적인 작, 연출극으로 11년만에 김수로프로젝트 12탄으로 부활한 이번 공연에는 배우 남보라가 덕배의 비운의 첫사랑 화이로 나서 처음 연극 무대에 섰다.
남보라는 "처음엔 되게 재밌고 유쾌한 작품인 줄 알았는데 대본을 읽으면 읽을수록 덕배가 너무 불쌍했다"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덕배의 모습을 보며 '아, 이게 그냥 웃긴 코미디극이 아니구나' 느꼈다"고 운을 뗐다.
"'택시 드리벌'은 단순히 웃긴 코미디극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우리 소시민들의 이야기, 말 그대로 정말 힘 없고 가난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어요. 그런 것들을 좀 많이 봐주셨으면 해요. 뉴스에서도 많이 접하는 이야기들이잖아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죠."
사실 소시민의 이야기인 만큼 극중 남보라가 연기하는 화이의 포지션은 어려운 면도 있다. 덕배를 중심으로 소시민의 이야기가 그려지는 가운데 덕배의 죽은 첫사랑 화이는 중간 중간 그의 아름다움과 아픔을 동시에 들추는 역할을 하기 때문.
남보라는 "화이는 살아있는 인물이 아닌데 그렇다고 죽은 사람으로 표현할 수 없어 어려웠다"며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을 많이 했다. 같이 화이 역을 연기하는 김주연, 이채원과도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고 밝혔다.
"화이가 죽었다고 해서 귀신처럼 하자니 그건 아니고, 고민이 많았어요. 그러다 결국 정답 찾은건 어쨌든 화이가 나올 때는 덕배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니까 그걸 중점으로 풀자고 했죠. 결국 화이가 죽긴 죽었지만 제가 그 상황에서 너무 슬픈 유령으로 나오면 덕배의 현재 상황들과 다를 게 없잖아요. 현재 덕배의 상황들과 그 때의 상황을 극과극으로 보여줘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덕배의 현실은 너무 치여 살아서 힘들고 치열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화이가 나오면 덕배의 행복한 시절이 되니까 격차를 더 드러내고 싶었죠."
화이가 등장하는 장면은 덕배가 행복했던 때인 만큼 그의 순수했던 때이기도 하다. 남보라는 바쁘게 달려오면서 연기를 시작할 때의 순수한 마음을 잊어버렸다고 생각할 때, 그 때의 순수함을 찾기 위해 연극에 도전한 만큼 덕배와 화이의 모습을 자신에게 투영하기도 한다.
그는 "내가 순수했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던 것처럼 덕배도 화이를 보면서 아무 계산 없이 순수했던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어 한다"며 "현실을 부정하고 잊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느끼지 않나"라고 설명했다.
"누구나 그런 마음이 있을 것 같아요. 저희 엄마도 가끔씩 '아유, 내가 젊었을 때는 명동에 구두 사러 다니고 그랬는데'라고 얘기해요. 다들 그렇게 그리워하는 시절이 있는 거죠. 덕배가 화이를 상상하는 것도 그런 마음인 것 같아요."
순수했던 때를 보여주지만 사실 화이를 분석하며 어려운 점도 많았다. 그래서 더 단순하게 생각하려 했다. 덕배를 떠나 보내는 마음을 인간 남보라로서는 100%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화이면 그럴 수 있다는 생각으로 화이에게 다가갔다.
남보라는 "사실 되게 단순하게 생각을 했던 게 그냥 착한 여자라고 봤다. 마냥 다 용서하는 사람"이라며 "무엇보다 세상을 떠난 여자이지 않나. 그러면 이 여자가 얼마나 세상에 미련이 없겠나. 자기가 죽었지만 자기를 떠난 남자까지도 품을 수 있는 그런 여자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덕배는 계속 시골에서 살았던 아이인데 처음 서울에 왔으니까 당연히 그 시절을 잊을 수밖에 없죠. 다들 그렇게 되고 싶어하잖아요. 멋지게 화려하게 살고 싶어 하는데 본질은 잊어 버려야지.. 그래서 화이도 잠시 잊혀졌던 것 같아요. 사실 화이 세명 다 어려워했던 게 '왜 죽었을까'였어요. 아이까지 가졌는데 왜 죽었을까.. 사실 이해가 안 갔어요. 다른 방법을 찾아볼 수도 있었을텐데.. 근데 화이잖아요. 그럴 정도로 너무 마음이 여리고 착한 애였으니까 짐이 되기 싫어서 자기가 죽음을 선택한 거죠.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화이잖아요."
화이에 대한 이해를 마음에 담기까지는 정말 어려웠다. 그래서 더 많이 상상했고, 저수지 안으로 들어가는 화이의 기분을 더 느끼려 했다. 그러다 보니 우울하기도 했다.
"언제는 너무 우울한 날도 있었어요. 장마 때 마냥 우울한 거예요. 운전 하고 가다가 너무 우울해서 차 세워놓고 펑펑 울었다니까요. 계속 그렇게 생각하면 그 날은 너무 우울했어요. 비까지 오고... 세명 화이가 다 그래요. 솔직히 연기하고 나면 우울해요. 그런 것들을 잘 조절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죠."
화이를 이해하고 작품에 대해 더 알면 알수록 처음 선 무대와도 어느 정도 가까워지고 있다. 무대에 익숙해져 버리면 기성복처럼 짜여진 모습이 나올 것 같다는 고민을 할 때 연출 역시 공연 후 항상 그날의 감정을 모두 잊으라고 조언했다. 때문에 공연 후 모든 미련을 다 놓아버리는 것도 배웠다.
"처음 무대에 섰을 때는 진짜 아무것도 안 보였어요. 심장이 나와서 뛰는게 너무 느껴지더라고요. 진짜 손을 부들부들 떨었던 기억이 있어요. 어떻게 공연을 마쳤는지 기억이 안 나요. 긴장해서. 관객들 소리도 너무 크게 들리고.. 근데 벅찼던 느낌은 확실해요. 너무 좋았고 관객들이 주는 에너지도 어마어마했죠. 일일이 반응해주는 그런 것들이 저를 되게 큰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저는 조그만데 무대에 서면 이만큼 커지는 느낌? 선배님들이 무대에 꼭 서보라고 했던 이유를 서보니까 조금씩 알아가고 있어요. 정말 많이 공부하고 있어요. "
연극 '택시 드리벌'. 공연시간 110분. 오는 11월 22일까지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문의 클립서비스 1577-3363
[사진 = 유진형 기자 zolong@mydaily.co.kr]
허설희 기자 husullll@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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