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국민배우 안성기는 올해 만으로 64살이다. 1957년 ‘황혼열차’로 데뷔한 이래 59년 동안 배우의 한 길을 걷고 있다. 아역배우 생활을 제외하면, 1978년 ‘병사와 아가씨들’ 이후 38년째 거의 해마다 관객과 만났다. 160편이 넘는 필모그라피 중에 터닝포인트가 됐던 베스트 5를 꼽았다.
1.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중학교 3학년 때 연기를 관두고 대학에서 베트남어를 전공했다. 베트남이 패망해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지자 다시 충무로에 돌아왔다. 안성기는 한 인터뷰에서 “70년대 영화계는 여성영화, 새마을영화, 반공영화가 주도했다”고 말했다.
질식할 것 같은 충무로에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이 등장했다. 유신정권으로 맥이 끊겼던 한국 리얼리즘의 부활을 알린 신호탄이었다. 고도성장기에 발생한 억압과 빈곤, 사회적 모순을 블랙코미디로 그려 호평을 받았다. 안성기는 이 작품으로 1959년 이후 21년 만에 대종상 신인상을 받았다. 당시 조감독이 배창호였다. 안성기의 시대가 열렸다.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안성기는 ‘바람 불어 좋은 날’ 이후 ‘만다라’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꼬방동네 사람들’ ‘안개 마을’ ‘칠수와 만수’ 등 수작 영화에 계속 출연했다. ‘고래사냥’ 시리즈와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흥행배우 타이틀도 꿰찼다.
벼락처럼, 배창호 감독의 ‘기쁜 우리 젊은 날’이 찾아왔다. 한국 영화 사상 가장 뛰어난 멜로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안성기는 “‘기쁜 우리 젊은 날’을 보고 영화감독이 된 사람이 꽤 많다”면서 “젊은 영화학도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 작품”이라고 말했다.
‘적도의 꽃’의 섹시미는 어디로 갔을까. 그는 영민 역을 맡아 혜린(황신혜)만을 사랑하는 순애보를 뛰어나게 연기했다. 제32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극중에서 영민은 연극배우 혜린의 관심을 끌기 위해 각본을 건네는데, 표지에는 ‘나의 사랑, 나의 신부’라고 씌여 있었다. 당시 조감독은 이명세였다. 이명세 감독은 훗날 박중훈, 최진실 주연의 ‘나의 사랑, 나의 신부’를 연출했다.
투캅스(1993)
안성기는 부패하고 능글능글한 코미디 연기까지 능수능란하게 소화하는 스펙트럼을 보여줬다.‘칠수와 만수’에 이어 박중훈과 두 번째 호흡을 맞춰 흥행 대박을 터뜨렸다. 제32회 대종상영화제에서 안성기와 박중훈이 공동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산이 높으면 계곡도 깊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나온다. 90년대 후반은 한석규의 시대였다. 젊은 배우들이 치고 올라왔다. 안성기는 서서히 대중에게 잊혀졌다. 그가 조연을 맡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이명세 감독의‘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조연이었는데, 당시엔 내가 기어를 바꿀 때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박중훈은 이 영화로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기반을 닦았고, 안성기 역시 악역 캐릭터를 빼어나게 연기하며 대중의 신임을 재확인했다.
사냥(2016)
안성기는 어느덧 60대 중반이다. ‘사냥’에선 람보처럼 뛰어다닌다. 누가 60대라고 보겠는가.
그는 마이데일리와 인터뷰에서 “지금에 와서야 이렇게 가장 많은 액션이 있는 영화를 했다는 게 앞으로 배우로서 좋은 의미에서 파란 불이 켜진 게 아닌가 싶어요. 가능성을 많이 보여줘서 좋아요”라고 말했다.
여전히 ‘가능성’을 찾는 배우. 그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진 제공 = 각 영화사, 롯데엔터테인먼트]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 ⓒ마이데일리(www.mydaily.co.kr).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댓글
[ 300자 이내 / 현재: 0자 ]
현재 총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