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마이데일리 = 잠실 김진성 기자] "어차피 치고 나면 부러질 텐데…"
두산이 10-1로 앞선 7회말 1사 주자 없는 상황. 이미 두산 덕아웃은 축제 분위기였다. 사상 첫 와일드카드결정전을 통과한 팀의 한국시리즈 진출이 눈 앞에 다가온 순간. 그렇다고 해도 매 순간이 승부처와도 같은 포스트시즌서 선수에게 농담을 할 수 있는 감독이 몇 명이나 될까.
박건우 타석이었다. 김태형 감독은 "마지막 타석에 나가기 전에 (박건우가) 방망이가 부러졌다고 하던데, '어차피 치고 나오면 부러질 텐데 그냥 쳐'라고 장난했더니 삐쳤다"라고 했다. 김 감독으로부터 핀잔(?)을 들은 박건우는 보란 듯이 2루타를 쳤다. 그리고 양석환의 좌중간 적시타에 홈까지 밟았다.
박건우는 삼성과의 플레이오프 2차전서 5타수 2안타 2득점으로 좋은 활약을 했다. 그러나 9일 1차전서 4타수 무안타에 그치는 등 플레이오프 전체를 볼 때 실적이 썩 좋지 않았다. 김 감독이 박건우에게 왜 농담을 했는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김 감독으로선 박건우에게 농담을 하며 과도한 긴장감도 풀어주고, 힘을 주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김 감독도 박건우도 두산도 7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이라는 선물을 받고 기분 좋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본지 사진기자가 담은 장면에 박건우가 김 감독의 주먹 하이파이브를 소심하게 거부(?)하는 모습도 보인다.
김 감독은 선수들의 마음을 잘 어루만지는 지도자다. 기본에 어긋나거나 프로 다운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특유의 카리스마로 다스린다. 간판선수의 2군행도 마다하지 않는다. 김 감독의 이런 면을 두산 선수들이 잘 알기 때문에, 알아서 자신의 야구에 집중하는 분위기가 7년째 굳건하게 형성돼있다.
대신 김 감독은 매 순간 치열하게 싸우는 선수들에게 지켜야 할 테두리 내에선 최대한 자신감을 갖고 싸울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2010년대 후반 왕조 시절 멤버가 많이 빠져나갔지만, 새롭게 주축으로 성장한 멤버들이 유독 포텐셜을 많이 터트리는 기본적 배경이다. 두산 DNA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삼성 구자욱은 플레이오프 2차전을 앞두고 "두산은 여유가 많더라. 분위기부터 잘 짜여진 느낌이다. 조급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자신 있게 플레이를 한다"라고 했다. 김 감독이 이런 두산의 문화를 100% 만든 건 아니다. 개개인의 치열한 노력, 코치들의 노고, 전력분석팀의 헌신 등 집단 지성의 힘이다.
그렇다고 해도 두산의 가을야구 DNA에 김 감독 특유의 리더십이 잘 녹아있는 건 확실하다. 여기에 7년간 가을야구를 꾸준히 치러오면서 쌓인 경험과 김 감독 특유의 판을 크게 바라보고 해석 및 대응하는 능력, 특히 선수 개개인에 대한 판단 및 결정을 내리는 '직관력'이 더해진다. "OOO이 무너지면 지는 거죠"라는 말은, 해당 선수에게 부담을 주는 게 아니라 김 감독의 냉정한 '관찰'과 무서운 '단정'이 결합된 코멘트다. 물론 OOO이 못해도 누구도 OOO 탓을 하지는 않는다.
코치 경험이 풍부한 키움 홍원기 감독과 '꾀돌이' LG 류지현 감독, 데이터분석 전문가 '허파고' 허삼영 감독이 김 감독에게 무너진 건 감독 경험이 부족한 것도 맞는 말이고, 김 감독의 남다른 역량까지 더해진 결과라고 봐야 한다.
이쯤 되면 무섭다 못해 경이로운 수준이다. 말이 안 되는 두산 가을야구 DNA에 '곰 탈 여우' 김 감독의 지분이 상당한 건 자타가 인정한다. 2021년 가을야구는 김태형 감독이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산에 전력상 앞선 LG와 삼성이 무너졌다. 그리고 두산에 3일간의 재정비 기간이 주어졌다. 에이스 아리엘 미란다가 돌아온다. 한국시리즈 결말도 장담할 수 없다. KT가 긴장해야 한다. 어쩌면 KBO리그 역사 최초의 4위 팀 한국시리즈 우승의 희생양이 될지도 모른다.
[두산 김태형 감독과 선수들. 사진 = 잠실 유진형 기자 zolong@mydaily.co.kr, 잠실 곽경훈 기자 kphoto@mydaily.co.kr]
김진성 기자 kkomag@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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