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교사 김혜인] 아빠가 퇴근하고 들어오자 아이가 현관으로 달려가서 “일이삼!”이라고 말한다. 아빠가 “일이삼”하고 화답하면 아이는 “일이삼사”하고 다음 숫자를 덧붙인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일이삼사…이십”까지 숫자를 주고받는다.
아이가 제 나름의 방식으로 말을 주고받는 걸 즐거워하니 다행이다. 그렇지만 “아빠 보고 싶었어요” “나도 보고 싶었단다” 같은 대화를 하고 싶다는 아쉬움도 느꼈다.
아기 때부터 아이는 목소리를 많이 내는 편이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빨리 말을 배우겠다고 기대했다. 그러나 ‘아’, ‘에’ 같은 모음 옹알이만 시끄럽게 할 뿐, 자음을 결합한 말소리를 내지 않았다. 두 돌까지 거의 진전이 없었다.
마침내 아이가 자음을 발음했을 때 내 상식과는 꽤 달랐다. 보통 유아는 ‘마’처럼 입술을 붙였다가 떼면서 발음하는 자음 옹알이를 가장 먼저 하는데 아이는 이 입술소리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더 어려운 경구개음 ‘즈’, ‘치’와 같은 소리를 자주 냈다.
언어치료사는 우리나라 유아가 가장 많이 표현하는 단어 20가지 목록을 줬는데, ‘맘마’, ‘멍멍’, ‘물’ 따위가 포함되어 있었다. 나중에 ‘엄마’, ‘아빠’를 말하게 된 후에도 그 20가지 목록에 있는 단어는 전혀 하지 않았다. 희한하게 ‘계단’을 말했다.
다음은 숫자를 말했다. 어느 날 아이가 장난감에 적힌 숫자 1부터 10까지를 보며 나름대로 구별해서 발음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음!(일) 이(이) 암(삼) 아(사) 에(오) 으!(육) 뗃(칠) 알(팔) 으(구) 입(십)”이었다. 특정 숫자는 반드시 강하게 발음하며 구별하는 게 퍽 흥미로웠다.
요즘에는 삼각형, 사각형과 같은 도형 이름이 숫자와 관련되어 있다는 걸 깨닫고는 모든 숫자에 ‘각형’을 붙여서 말한다. 일각형, 이각형, 십이각형, 사십각형... “일각형, 이각형은 없어”라고 말해 줘도 꿋꿋하게 말한다. 아이가 말 규칙성을 알고 단어를 조합할 줄 아는 듯 보여서 희망적이다.
아이만의 단어가 생기기도 했다. 고양이나 강아지 사진을 보면 꼭 “응딸응딸”이라고 말한다. “알쉽알쉽 알쉽다” “온고지 안안”이라는 말도 하는데 아무리 맥락을 고려하고 비슷한 말을 떠올려 봐도 무슨 말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나중에 아이와 더 의사소통이 되면 무슨 뜻인지 꼭 물어보고 싶다.
아이가 처음으로 “보고 싶다”는 표현을 쓴 건 아주 의외의 상황에서였다. 아이가 천방지축 뛰면서 문을 닫다가 모서리에 발가락을 부딪쳐서 많이 아파했다.
내가 안아서 달래주니 말이 잘 나오지 않을 정도로 울면서 더듬더듬 “엄마, 보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아파요”가 아니라 “보고 싶어요”라니. 상황에 맞지 않게 말하는 게 재밌으면서도, 자기 나름대로 뭔가를 표현하는 모습이 대견했다.
인간은 어떻게 언어를 습득하는 걸까. 거창한 질문은 제쳐 두더라도, 아이는 내가 말을 배우는 일반적인 과정이라고 알고 있던 얕은 지식도 자주 깨뜨렸다. 말 배우는 속도가 느린 만큼 내게 독특한 재미를 주는 것만 같다.
일 년 전 이맘때쯤 아이는 ‘엄마’라는 말도 제대로 못했다. 그런 녀석이 이제 “엄마 보고 싶어요”라는 말을 한다. 일 년 후 내게 어떤 말을 할지 몹시 기대된다.
|김혜인. 중견 교사이자 초보 엄마. 느린 아이와 느긋하게 살기로 했습니다.
교사 김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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