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교사 김혜인] 아이가 넓은 공터에 도착하자 킥보드에서 내려왔다. 나도 킥보드 타는 아이를 따라 다니느라 바짝 조였던 긴장을 풀었다.
성장은 계단식으로 한다더니 킥보드 타기가 바로 그랬다. 작년 봄에 아이가 킥보드에 관심을 보이는 게 반가워서 서둘러 중고 킥보드를 장만했다.
아이가 한 발을 킥보드에 올린 채 다른 발로 땅을 구르는 동작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아이가 두 발로 킥보드에 올라 서면 내가 조금씩 끌면서 재미를 느끼게 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녀석 겁이 좀 많아야지. 절대로 발을 올리지 않고 오직 끌고만 다녔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이 킥보드 타는 모습을 보면 아주 신나는 몸짓으로 그를 가리키며 나를 쳐다봤다. "저것 봐, 나도 킥보드 있어!"라고 말하고픈 표정이었다.
아이는 여름이 지나 가을이 되도록 킥보드를 그저 끌고 다니기만 했다. 치료사조차도 킥보드를 타도록 유도하지 못했다.
문제는 아이가 나를 포함하여 다른 누구도 제 킥보드를 만지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었다.
특히 횡단보도를 건널 때가 가장 난감했다. 킥보드를 끌며 건너느라 아이가 절반도 가지 못했는데 보행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었다. 내가 킥보드를 대신 들거나 끌고 가려 하면 킥보드 손잡이를 더욱 세게 잡으며 횡단보도 중간에 버티고 섰다.
꼭 자기 힘으로만 끌고 건너야 했다. 나는 신호가 바뀌어도 한참이나 출발하지 못하는 자동차 앞유리를 향해 죄송한 표정으로 연신 머리를 조아리곤 했다.
그래서 아이가 몇 달만에 킥보드를 가져가지 않고 나설 때 반가운 마음마저 들었다. 한두 번 킥보드를 현관에 그대로 둔 채 나가더니 어느새 킥보드를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
"요즘은 왜 킥보드에 관심이 없을까?" 나는 별다른 아쉬움 없이 한 말인데 남편이 어두운 목소리로 "나 때문인가 봐"라며 자책했다.
남편 설명은 이랬다. 둘만 외출한 적이 있는데, 그날도 횡단보도 한복판에서 빨간불로 바뀌어서 자기가 킥보드를 들고 서둘러 건넜다고 한다. 아이는 당연히 길바닥을 뒹굴며 30분 넘게 울다가 진이 다 빠져서 남편에게 고꾸라졌다고.
그제야 어렴풋이 기억났다. 아이가 울다 지친 얼굴로 남편 품에 안겨 잠든 채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아이가 킥보드를 안 가져 나간다고.
아이는 부정적인 경험을 크게 받아들이고 오래 기억하는 편이다. 그러나 나는 그 때문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는 어떤 것에 한 번 마음을 빼앗기면 한동안 그것에만 지겹게 몰입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거부하곤 했다. 바나나, 고구마 등 음식이 그랬고 지하철 타는 일이나 컵 쌓기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일도 그랬다.
혹은 겨울이 되어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이는 날이 추워지면 자연스레 외출을 줄였다.
아이는 내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계절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차리며 봄을 준비했다. 한파는 끝났지만 늦겨울의 바람이 아직 많이 매서운 2월 끝자락의 어느 날이었다. 며칠 지나면 날이 좀 풀리려나 하던 차에 아이가 현관에 몇 달간 방치했던 킥보드 손잡이를 잡았다.
게다가 아이가 킥보드에 두 발을 올렸다. 내가 슬슬 끌어주자 입가에 웃음이 돌았다. 더 빠르게 끌었다. 그 속도를 즐기는 듯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었다.
그러고는 오른발만 킥보드에 올린 채 왼발로 바닥을 구르며 간다. 그간 연습이라도 해본 것처럼. 그대로 굴러가 벽에 부딪칠까봐 아이를 좇아 달려갔다. 내가 손을 뻗기도 전에 아이가 손잡이를 틀며 방향을 전환했다.
늘 그랬다. 아무리 애써도 절대 시도하지 않던 걸 어느 날 문득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내가 말했잖아, 당신 탓이 아니라고. 아직 퇴근하지 못한 남편이 옆에 있기라도 한 듯 마음 속으로 말했다. 아이는 지난 겨울 내 저 킥보드를 마음 속으로 타고 또 타보며 연습한 거야. 그러고는 어느 날 갑자기 쓱 해버리지.
좋아, 내년엔 자전거다.
|김혜인. 중견 교사이자 초보 엄마. 느린 아이와 느긋하게 살기로 했습니다.
교사 김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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